BGM: Hisaishi Joe - 첫사랑 (드라마 태왕사신기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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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으로 날아든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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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으로 날아든 새
#본편전이야기 #령없지 #추락하는것은날개가없다 #버드스트라이크
이추 @whyshenme
"트라우마는 마주해야지 이겨내는 걸까?"
검은 머리칼을 꽁지머리로 질끈 묶은 학생이 밥을 우물거렸다. 방금 전까지 역사 과제 얘기 중이었으면서 왜 딴소리야? 라는 눈빛이 몇 번 오갔지만 대학생들의 점심시간이란 으레 따분하기 그지없었고 과제와 동시에 몰려드는 살인충동은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의 물레방아에 물길을 대 줄 때에만 잠잠해졌기에 그들은 나름대로 진지하게 답변했다.
"아마도?"
"그건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아니, 그게..."
왜, 뭔데. 그가 말을 하지 않고 미적거리자 밥 먹는데에만 열중하고 있던 학생들조차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의 입술만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하자, 그는 압박에 눌린 듯 어쩔 수 없이 돌려돌려 입을 열었다.
"죽은 사람을 계속 보는 것 같아서."
근처의 모든 사람들이 정적에 휩싸였다. 밥을 막 입에 물고 있던 학생조차 눈이 크게뜨여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서 말 안 하려던 거였는데!
"아, 잊어라, 잊어!"
주변의 시선이 반으로 갈렸다. 미친 놈을 보는 쪽과 안타까운 기색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쪽. 어느 쪽이던 둘 다 불편했다. 왜 말했지.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애초에 이 사람들에게서는 어떠한 실질적인 조언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꿈이나 반복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신에 이상이 있거나 어떠한 초현실적인 행동에 연관되어있는 것일 텐데, 보통은 첫 번째가 대부분인 세상에 살겠고, 그리고 혹여 두 번째 경우라도 어느 정도 헛소리일 테지만 그는 확실히 두 번째였다.
그렇다. 놀랍게도 이 세계에는 초현실적인 것들이 있었다. 어떻게 아느냐. 바로 그가 그 초현실적인 핫윙치킨이었기 때문이다. 남명곡의 서른... 몇대째 수화인.
태어나보니 붉은 닭-사실은 신조지만-이었고, 부모도 형제도 없었으며 가진 것이라곤 빌어먹을 선조들이 물려준 골동품 뿐이었고, 이 세상에 그와 비슷한 존재는 없었으니 그가 지금 죽은 사람을 몇 번씩 계속해서 보는 것 같다 해도, 보통 사람과 비슷한 증세는 기껏해야 트라우마나 환각 등등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는 정말, 선조들의 주작골에 맹세코 정신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말이다!
꿈에서 보는 광경은 언제나 선연했다. 그는 달리고 있었다, 다른 손에 낯선 손을 쥐고. 해가 지지 않았지만 나무로 인해 보랏빛 그림자가 낯선 이의 얼굴 위에 드리워져 볼 수 없었다. 항상 숲을 달리고 달려, 나무들이 없어지고 저녁놀이 그의 얼굴로 찬란하게 드리워질 때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어슴푸레하게 본 주변은 삭막하여 알 것이 없었고, 옷은 청바지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다니는 지금에 비해 아주, 상당히 오래된 복식이었으니 수화인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고 대략 짐작해 결론 내렸다. 이미 살아있다면 천년묵은 악귀 수준이겠으니, 어느 쪽이든 실제로 만나서 좋은 일은 없겠지마는.
"트라우마라, 준비가 된다면?"
"당연히 마주해야지! 쫄보처럼 숨고 있냐?!"
"뭐야? 이건 간단한 감기가 아니야, 너처럼 막무가내로 대하면 안된다고!"
"야, 남자 주제에 고작 트라우마에 빌빌 떠냐?"
"트라우마에 남자 여자가 어딨어, 멍청한 놈이!"
그러고서도 네가 XX대학 출신이냐? 조용히 밥 먹던 시간은 어디 가고 도리어 입에 물린 밥알까지 튀기며 열변하는 동기들을 수화인은 차마 못 봐주겠다는 듯 욕지거리를 하며 숟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아가리에서 나오는 것은 허튼소리 뿐이었고 이 새끼들을 친구로 놔둔 내가 용하다 싶어 한바탕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하려던 순간, 등 뒤에서 돌연 쿵, 소리가 울렸다.
"아, 씨! 깜짝이야!"
소음자체는 별것이 아니었지만 그 뒤로 이어진 크고 작은 고함이 더욱 더 컸다. 몇몇 사람은 정말로 놀랐는지 벌떡 일어서다 의자가 나자빠지거나 음식 일부가 쏟아져 바닥이 엉망이 되었다.
눈살을 찌푸리고 조그맣게 꿍얼대며 뒤돌아보니 어째서 이런 소리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투명하던 유리창에 거대한 거미줄처럼 그어진 균열이 아슬아슬하게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가장 중심에서 거친 둥근 모양의 거미줄 모양으로 연결되어 곁에 있던 누군가가 다칠 정도로 깨지진 않았지만, 세찬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아슬하게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새가 박았나보네."
"뭔 새?"
"웬갖 잡새들."
시시콜콜한 농담처럼 들렸지만 사실이었다. 다른 동기들이 열이 붙어 싸울 때 홀로 조용히 있던 사람이었다. 당황도 하지 않은 채 으레 있는 일인 듯 안경을 매만지고 밥 먹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꽤나 괴이했지만 수화인은 애써 그런 기색을 숨겼다.
손가락에 낀 붉은 반지를 엄지로 문질문질거리며 손을 꼼질거렸다. 그의 동기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다 만두 하나를 깨작거리다 입맛이 떨어졌는지 도로 내려놓고 그릇을 조금 앞으로 밀었다.
"날아들 수 있을 줄 아는 거지."
보이지 않아서 저게 얼마나 단단한 줄 모르니까, 괜찮을 줄 알다가 보이지 않는 벽에 끽! 하는 거야. 수화인은 머릿속으로 상상을 해보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유리창도 유리창 값이니까 큰 회사 같은 데에서는 큰 맹금류 스티커 같은걸 붙여놓기도 하던데, 그건 게네들 지침이고 평범하게 볼 수 있는 데에 스티커 같은 건 별로 없고.
"몇 달 전에도 저렇게 한 번 깨지지 않았어?"
"한 번이 아니라 그전에도 몇 번 더."
계속 유리를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테이프만 덕지덕지 붙이면 언젠가 또 금이 갈 테고... 누구도 쉽사리 주변에 다가가지 않는 자잘한 균열의 중심에는 작은 핏자국이 묻어있었다.
살아있을까? 자신도 모르게 말하고서 그는 입을 닫았다. 그러나 가볍게 무시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그에게 짧은 시선을 던진 후 조용하게 읊조렸다. 그렇게 아파서 살아있다면, 치료해줄 이도 없으니까...
살아있길 바라는 거 자체가 조금 너무하지 않냐?
"야, 그건 아니지."
등 뒤에서 다시 한번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수화인의 물음에 치고받고 싸우던 이들 중 하나였다.
"너도 쟤처럼 그러냐? 상황을 왜 이렇게 다 비관적으로 바라봐? 그리고 네가 아까 물었었지?"
불씨가 갑자기 이쪽으로 튀자 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수화인은 괜히 화들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수화인의 어깨를 굳게 잡고 소년 만화에 나오는 상투적인 응원의 말투처럼 말했다.
"이보게 친구. 네가 무슨 일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심리학 전공자로서 한 마디만 할게. 트라우마를 마주하려는 건 아주 좋은 행동이야. 하지만 천천히 하는 게 좋아. 무턱대고 들이댔다간, 저기 저 새처럼 쥐포가 될지도 모르니까."
*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그는 도대체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 그런 일을 좀 봤다고 그러나? 수화인이 새가슴인지, 책상에 앉고 노트를 펼쳐도 단어 하나가 나오지 않아 하얀 종이만 빤히 바라보고 손가락을 툭툭 건드리다 5분도 되지 않아 자리를 박차고 나온 수화인은 거실에서 과일을 먹고 있는 도란도란한 가족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소파 아래 바닥에 앉아 작게 잘린 배를 한입에 가득 물자 아삭아삭한 식감이 입을 가득 채웠다. 배즙이 입가와 턱선을 타고 흘러 찐득찐득한 감각이 남자 꿍쳐둔 휴지라도 없나 무심히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정신과 명함이 손에 집혔다.
이 새끼... 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며 명함을 사정없이 구겨 집어넣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환상을 겪는 그 즉시 병원을 찾았겠지만, 그는 남명곡의 수화인이었다. 애초에 인간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단 말이다!! 아마도 세상천지에 그를 이해해줄 사람은, 이미 죽어 백골이 된 서른명 정도의 조상 빼고는 없을 것이다, 염병.
남명곡의 수화인. 현재의 명칭은 '적연' 이었고, 대협곡의 주변으로 울창한 수풀과 산맥이 이어져 있어 자연의 미가 남김없이 드러나는 장소였다.
관광지로의 개발이 이제야 발표된 그 곳은, 아무도 지금까지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이, 작은 화염과 오래된 세월 동안 잠들어있던 용암의 티끌에서 그는 빚어져 나왔다. 선대의 어렴풋한 기억만을 제 품에 삼킨 채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린 수화인은 알 수 있었다. 자신과 유사한 새들, 그 새에게 잡아먹히는 하찮은 벌레들조차 어떠한 형태로든 유사한 혈육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만이 기이하게도 이 세상에 홀로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적연에서 그가 내내 홀로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때로는 정말 말 그대로 홀몸인 것과 같이 존재함에도 홀로임을 느끼는 것이 더 가혹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자연스레 의문은 생기고 풍경을 볼 때마다 솟구쳐오르는 감정에 싱숭생숭해지는 것이 점점 질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삶이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끝만은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어버렸다. 윤회와 환생에 대한 개념을 벗어나 어쩌면 전생 수화인의 기억이 내려온 것일지도 모르지만, 기억을 계승한 이상 어쨌든 빌어먹을 운명공동체와도 같은 신세에 놓여버린 것이 아닌가!
자신도 알 권리가 있었다. 결심했어. 수화인은 배가 원수를 대신하는지, 적장의 살점을 씹어먹듯 대단한 기세로 남이 깎아놓은 배를 염치없이 해치운 후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어머니가 건네준 컵에 담긴 물을 시원하게 들이키려했다.
"아얏..."
"어머, 괜찮니?"
수화인은 이마를 찡그리며 급히 입에서 컵을 떼어냈다. 크게 부서져 얼마 전 강력본드로 붙여놓은 잔은 조각을 찾지 못해 이가 빠진 그대로 였고,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빠밤.
어머니는 온갖 오두방정을 떨며 금이 간 컵을 가지고 가 신문지로 둘둘 만 다음,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쓰레기봉투에 넣고 입구를 묶어버렸다. 꽤 아끼던 식기인지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보였지만, 이미 망가진 걸. 역시, 부서진 건 그냥 버리고 새것을 샀어야 했지?
"아냐, 엄마. 괜찮아요."
진짜로 괜찮았는가? 상처는 괜찮았지만, 적연에 간다는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패기좋게 결심했지만 웬만하면 가고 싶지 않았다. 자연스레 꺼려지는 것에 가까웠다.
도시 문물에 적응한 붉은 닭에게 적연은 그저 어느 순간 튀겨질 수 있는 100% 자연식 그릴이기도 했고, 본디 아무도 모르는 미지로 향한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감을 수반한다.
하지만 수화인은 알고 있었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어느 순간 천편일률적이게도 한 가지 난제에 가로막히게 된다는 것을. 이대로 무지한 채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미지의 길을 탐구해 나가야 할지.
"엄마."
"응? 왜 그래? 아직도 아프니?"
"나 잠깐 여행 좀 다녀와도 될까?"
"갑자기? 어디로?
수화인은 피하나 섞이지 않은, 연로한 인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집안의 유일한 외동으로써 애정 어린 눈길을 독식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이것만이 수화인이 원하는 전부는 아니었다. 긴 생애를 이것으로 만족하기에는 어딘가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이 그치지 않았다.
기로에 서서 하나를 선택할 때가 왔고, 수화인은 어디가 되었든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글?"
*
정글이긴 했다. 막 개발 허가가 난 천연의 요새와도 같은 적연 대협곡. 기차를 타고 부모님의 아는 지인의 지인에게서 빌린 오래된 트럭은 포장되지 않은 시골의 도로를 굴러갈 때마다 덜컹덜컹 흔들렸으나 수화인은 그런것에 불평할 만큼 여유롭지도, 배은망덕하지 않았다.
트럭 안 라디오 버튼을 되는대로 이리저리 돌려 그나마 음성이 잡음과 섞여나오는 채널을 찾아냈지만 이제 더 이상 무슨 내용을 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 있는 콘솔박스 위에 얹힌 재떨이에서는 아직도 미약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는 대단히 간결한 동작으로 입에 물고 있던 담배 또한 꺼버린 후 연기를 내뿜었다.
서쪽으로 아무도 모르게 난 태양 빛이 작게 난 트럭의 창문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유리에 반사되는 태양은 천천히, 쉬엔지의 눈가에서 목으로 붉게 떨어져 갔다.
털털털 불안한 소리를 내던 트럭은 적연으로 가는 길의 중턱에 걸쳐져 있는 한 마을로 들어섰다. 산 좋고, 물 좋고. 밭에는 사람들이 일하고 있고, 조금 옛날식이지만...
사유의 파도에 몸을 맡기던 수화인은 즐거운 지직거리는 음악에 맞춰 콧노래를 부르다, 기시감에 돌연 트럭을 멈췄다. 시야의 사각지대로 자연스레 침입해오는 녹음의 풍경은 분명 익숙했지만, 그보다 더 낯설면서 동시에 기이했다. 사람의 '감' 이란 살아온 세월을 토대로 했고, 그것은 대충 살아나온 지 15년 정도만 넘어도 대충 때려 맞출 수 있었으니 수화인의 이십 몇 년 치 감이란 얼마나 잘 적중하겠는가.
트럭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닫았다. 시골 마을은 어느새 고요에 잠겨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그의 목과 이마를 타고 돌았으나 한편으로는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점점 더 어두운 빛으로 몰아쳐 들어가는 하늘은 부옇게 좀먹어가는데도 태양은 화광으로 이글거렸다. 태양 빛이 너무나 밝았던 탓인지 눈알이 시큰해져 왔다. 날아간 지 오래되지 않아 저 멀리 보이던 높은 산에 가까워졌다.
구름은 높았고 저물어가는 태양에 붉게 물들었다.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풍경이었으나, 기이한 감각은 계속되어 수화인은 자신도 모르는 새 손에서 스며 나온 땀을 코트 위에 대충 닦았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날 불렀어?"
환청이라도 들었던 것일까, 공중에서 갑자기 집중력을 놓친 새는 타이밍 좋게 불어닥친 강풍으로 인해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쓰지 않은 날개와 변덕스러운 기류의 시너지는 굉장했다. 수화인은 바람 앞의 빨간 등불처럼 흔들리기를 계속하다, 결국 저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의 비명이 비행운처럼 길게 꼬리를 물고 떨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상한 감각에, 내재하여있던 가슴 속의 불씨가 갑자기 맹렬히 치솟는 감각에 휩싸이며 숨 막힐듯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 이것은 진짜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방이 불에 끌리듯 가까이 갔다가는 날개가 전부 타버릴 것을 알고 있으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것처럼, 빽빽한 나무 위로 추락하며 온 몸이 긁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나무뿌리 근처에 쓰러진 수화인은 손 하나 까딱 못하고 그저 긴 속눈썹을 한번 깜빡거리고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의 얇은 손가락 위에 끼워져있던 붉은 홍옥 같은 열반석이 공포에 질린 듯 덜덜 떨리기 시작했던 것을.
*
달리고 있었어. 해가 져서 곧 짐승들에게 물어뜯기기 딱 좋을 그 시간에. 그러나 혼자는 아니었지. 다른 손에는 또 다른 애의 손을 잡고 있었어. 해가 지지 않았지만 얼굴은 숲에 자라는 나무들의 그림자 때문에 보이지 않고, 그저 내 손에 잡힌 네 하얗고 작은 손만이 곁에 있다는 증거였지.
나이에 맞지 않는 굳은 살이 박혀 결코 유약하지도 순탄하지도 않았던 삶을 증명해주는 것 같은 손이었어.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어. 날 수 있었지만 날개를 펴지 않았어. 먼저 빨리 가는 것은 의미가 없었고, '도망'이라는 행위보다, '함께'라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기뻐하고 있었어...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도 그 숨결 사이로 환희가 느껴졌어. 웃고 있었어. 마치... 내일 세상이 끝나도 다 후련한 것처럼.
한참 동안 그렇게 달렸어. 어둠이 거의 끝까지 내려앉아서 붉은 빛이 구름 사이사이로 조각나 있었지. 숲에서 길을 잃었던 것 같아. 우리 둘 다 길을 몰랐어. 하지만 결코 두려움이란 없었지. 그렇지?
...그렇지, 링위엔.
한참 동안 달렸다. 나무들이 점점 적어져 태양도 그제야 수화인의 발치에 천천히 쏟아졌다.. 수화인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양 뺨이 붉게 타오르는 황혼에 생기를 덧입힌듯 했다. 아니, 황혼이 아니라면 그의 작은 새일까? 수화인은 그제야 손만이 아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들은 누가먼저라 할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허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붉은 날개를 펼쳐 뛰어오르듯 날아 그를 안고 기쁨에 차 낮게 빙빙 돌았다. 최고의 비행이었다. 서로 단단히 안아버린 두 소년들은 상대방의 검은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손이 여린 볼살을 쓰다듬었다. 해가 곧 질 것만 같았다. 길을 잃은 숲은 스산하고 위태로웠으나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태양이 어두운 얼굴의 옆면을 붉게 물들였다.
검은 머리는 짙은 보랏빛으로 빛났다. 서로의 얼굴 사이로 드리워지던 석양은 곧 둘에서 하나로 겹쳐진 인영에 가려졌다.
팔은 서로의 온도를 찾아 헤매고, 뜨겁고 조용한 숨결은 낯선 숲에서 가장 크게 수화인의 귓가에 울렸다.
홀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웅웅이며 흔들리던 붉은 보석은, 마침내, 또 한 번, 풍랑에 마모된 암석처럼 갈라져 부스러지고 말았다. 열반석의 작은 조각들은 작은 모래처럼 그의 손아귀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의 기억과 함께.
수화인은 온 몸의 힘이 풀린 듯 천천히 무릎부터 꺾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황혼이 드리워지는 하늘에 안개가 낀 것 처럼 시야가 부예졌다.
가둬두었던 둑 안의 물은 터진 순간 거대하게 몰아쳐왔다. 수화인은 깨달았다. 아니, 그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과거를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기억을 떠올리는 대신 그는 아주 오래전 가슴 속에 깊이 묻어버렸던 환상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결코 이뤄질 일 없는...
인간세계의 행복이야 실로 천편일률적이었지만, 이 이후로 그는 오랜 세월에 점점 거대해진 감정을 다시 한번 뼛속 깊이 느껴야했다. 눈물 젖은 시야 속에서 천천히 태양은 마치 깨진 유리가 천천히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유리를 깨트린 것은 수화인 그 자신이었다.
대가는 컸다. 뼈에 사무치도록, 육신이 부서지도록 거대한 몇 천년의 농축된 감정들이 삽시간에 그의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사람은 분명 하나의 감정만 감당할 수 있다. 복잡한 감정은 혼란스러움이 되었고, 단시간의 혼란스러움조차 사람을 이도 저도 못하게 망가트릴 수 있었는데, 과연 몇 천년의 세월을, 고통스러워 차라리 망각을 택한 기억을 버텨낼 수는 없었다.
유리창에 힘껏 날아든 새는 유리창을 뚫고, 산산조각이 난 유리와 함께 뒤섞여 버린 것이다. 짐승의 단말마 같은 신음이 수화인의 가슴에서 끓어올랐다.
차오르는 숨은 차마 가다듬지 못하고 눈물과 함께 뒤섞였고, 하늘을 휘어잡을듯한 날개는 어느 한쪽이 부러진 것처럼 축 처져버렸다.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은 상처의 산물이었으며 오랫동안 지는 태양은 밤으로만 향해가고 있어, 다시는 떠오를 일이 없었고 그 또한 영영 일어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수화인이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그 자신조차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다가 마침내 모든 것이 괜찮아졌을 무렵 다시 떠올릴 말은, 유리창에 새가 날아든 날 담담히 부정적인 말만 내뱉던 동기가 한 말이었다.
"이봐, 나는 그 새가 죽어야 한다고 한 게 아니야."
물론 죽었다고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머리를 전속력으로 박아버린 안타까운 새들의 최후를 통계로 모아 도출해 나온 평균의 결과를 말한 거였지. 새를 치료해줄 의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말이야, 분명히 살아있는 것들이 있다고. 죽을 만큼 고통스러울 텐데, 그래도 살아남는 게 있다니까.
그들은 몰랐겠지만, 창문 아래로 떨어진 새를 누군가 발견했었다. 그 사람은 작은 새를 안고, 병원으로 곧장 달려갔을 것이다.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몇번이고 속삭이면서.
속절없이 죽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보이지 않는 벽에 전속력으로 부딪혀, 온 몸이 망가지고 부서져 버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무엇이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느 순간 좌절해야 한다. 고통받아야 하고, 눈물 흘려야 한다. 하지만, 죽을 만큼 아픈 고통이 그들을 결코 죽이지 못한 순간...
"그런 것들만이, 언젠가는 행복해지리라는 희망 또한 가져볼 수 있지 않겠어."